보나벤처 호텔은 1976년, 건축가인 존 포트먼에 의해 세워졌습니다. 이 호텔의 가장 큰 특징은 포스트 모더니티가 가미되었다는 것이에요. 사람들이 호텔에 진입하게 된 후(실제로 입구 그 자체도 벙커의 입구처럼 생겨서 찾기가 난해하다는 군요) 가장 먼저 들어서게 되는 것은 바로 로비겠죠. 보통 합리적인 공간으로 표현되는 모더니즘 건축양식을 가진 호텔이라면 우리가 가지고 있는 공간개념으로도 얼마든지 호텔의 프런트나 객실을 찾는 데는 문제가 없을 것입니다. 바로 우리가 기본적으로 생각하는 공간의 ‘연속성’ 때문이겠죠.


하지만 보나벤처 호텔은 모더니즘을 거부합니다. 바로 방문객들이 로비에서부터 방향을 종잡을 수 없게 되는 것이죠. 심지어 보나벤처 호텔의 원래의 설계대로라면 사람들은 방향 그 자체를 찾는 데만 너무 어려움을 겪어 호텔 측은 각 탑에 색깔별로 표시를 하고 방향 표지판을 붙여 놓는다고 해요. 


프레드릭 제임슨은 [Postmodernism, or the cultural Logic of Late Capitalism]이라는 책에서 포스트모던 사회에서는 컴퓨터 등 전자매체의 ‘재생산 기술’이 과거 자동차 조립 라인과 같은 ‘생산 기술’을 대체한다고 주장했어요. ‘재생산 기술’은 이전에 생산되었던 것을 반복해서 생산할 뿐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사람들은 단조롭고 특징이 없는 사회 속을 살아가게 되며, 실제로 자신들이 살고 있는 다국적 자본주의의 체제나 폭발적으로 성장하는 문화나 상품의 시장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해요.


존 포트먼의 보나벤처 호텔은 포스트모던에서 나온 하나의 은유에요. 모던한 공간에 적응해 있던 사람들이 초공간에서 표류하는 것은. 추기 자본주의의 다국적 경제와 문화의 폭발 가운데에서 방향감각을 상실한 채 표류하는 것을 상징한다는 것이죠. 요컨대 제임슨이 생각하는 오늘날의 핵심문제는 포스트모던한 공간 속에서 사람들이 자신들의 위치를 파악하는 능력, 그리고 그 공간을 파악하는 능력을 상실했다는 점이 되는 것입니다.

제목 : 건축 인문의 집을 짓다

지은이 : 양용기

초판 1쇄 발행 : 2014년 2월 5일

출판사 : 한국문학사


http://www.kyobobook.co.kr/product/detailViewKor.laf?ejkGb=KOR&mallGb=KOR&barcode=9788987527352&orderClick=LEB&Kc=


'건축’이라는 학문을 얼핏 생각해보기에 너무도 먼 학문입니다. 이공계로 분류되는 학문일뿐더러, 실제로 건축과 관련된 내용을 관심 갖고 배우더라도 평생 개집 하나 만들지 못할 확률이 너무나 크죠. 그렇기에 건축에 관한 책을 볼 시간에 차라리 전공서를 한 편 더 보는 편이 도움 될지 모른다는 생각마저 듭니다. 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우리는 건축에 대해 관심을 가져야 할 필요가 있어요. 


건축의 필요성은, 본질에 대해 이해한다면 쉽게 알 수 있습니다. 건축의 기본적인 기능은 바로 인간을 자연으로부터 보호하는데서 시작합니다. 매슬로우의 욕구 이론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인간은 기본적으로 주거할 수 있는 공간을 원합니다. 인간은 낮과 밤, 계절에 따라 변화하는 날씨와 같은 각종 자연현상으로부터 보호를 받아야 합니다. 동물과 달리 나약한 육체를 가졌기 때문이죠. 건축은 이러한 인간과 자연의 매개체로 시작됩니다. 자연으로부터 인간을 보호하는 역할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런데 건축은 인간을 보호하는 역할만을 수행하지 않습니다. 자연과 분리된 인간은 건축을 통해 개인으로 탈바꿈 됩니다. 분절된 공간, 그것도 집이라는 자연과 다른 개체로부터 독립된 공간을 가지게 되며 인간은 독립된 개인으로 나타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건축을 이해한다는 것은 인문학의 시작을 이해한다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현재의 우리는 건축 속에서 살아갑니다. 단순히 방이라는 작은 공간에만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만들어낸 다양한 건축 안에서 삶을 향유하죠. 이러한 건축이 집대성 된 곳은 다름 아닌 도시입니다. 물론, 농촌과 같은 교외지역에도 건축이 반드시 있으나 도시만큼 집약적인 경관을 보여주진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도시의 이미지를 단순히 지도에 나타난 수치적인 행정구역만으로 이해하지 않습니다. 도시 내에 각종 랜드마크와 같은 무수히 많은 건축물로 도시를 생각하죠. 가령 약속을 잡을 때, 친구와 ‘서울특별시 마포구 동교동 165’에서 만나자고 하지 않습니다. ‘홍대입구역’이라는 건축을 만나는 장소로 정합니다. 이처럼 건축은 우리가 도시를 생각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양용기의 『건축, 인문의 집을 짓다』라는 책은 우리 삶에 가장 밀접한 사물인 ‘건축’을 인문학적인 이해를 통해 설명하고자 합니다. 이 책에는 어려운 제도나 실제 건물을 만드는 기술에 대한 내용은 하나도 없어요. 오히려 건축의 기본적인 개념, 건축에 반영되는 미술사, 사회와 도시를 창조하는 요소로서의 건축, 과학과 연결되는 건축, 철학ㆍ미학ㆍ심리학을 통해 이해하는 건축, <건축학개론>과 같은 영화 등으로 이해하는 건축에 대한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이 책만 본다면 왜 건축이 문과과목이 아닌지 이해할 수 없을 정도에요. 책의 제목에서 알 수 있다시피 『건축, 인문의 집을 짓다』는 건축학을 전공하지 않는 일반인에게 건축학이 인문학과 만났을 때를 소개하는 책입니다. 실제 전공자에게는 큰 도움이 되지 않을 수 있겠습니다만 건축에 대한 고민을 해본 적 없는 사람들에게는 충분히 쉽게 다가가는 책입니다. 내용도 전혀 어렵지 않고요. 


이 책을 읽고 난 뒤, 서울 한복판에 자리한 무수히 많은 건축물을 하나하나 해석하며 ‘읽어본다면’ 충분히 재미있을 것 같습니다. 





<이재용, Memories of the Gaze_수동정미소, 2012>

이재용의 <Memories of the Gaze>연작은 참 흥미롭습니다. 작품 설명에 따르면 이 사진은 정미소를 찾아가 같은 장소를 다른 시간대에 여러 번 촬영해 한 화면에 집적한 사진 작업입니다. 같은 장소를 수십 번 찾아 찍지만 정확한 지점에서 같은 각도로 똑같은 사진을 다시 찍기란 불가능에 가깝기 때문에 여러 장의 사진을 겹쳐놓은 이미지는 진한 안개가 낀 풍경처럼 두루뭉실하고 흐릿합니다. 흐릿한 윤곽의 이미지는 '기억의 시선'이라는 작품명이 의미하듯 우리의 왜곡되고 희미해지는 기억의 속성을 나타내며, 미묘한 변화들을 포착해 그 순간의 기억을 다시금 눈으로 확인할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사진을 보면 꽤나 '지리적인' 사진으로도 볼 수 있지 않나하는 생각이 듭니다. 데이비드 하비에게 있어 장소란, 공간과 시간의 흐름 속에서 조건부적 형태의 '영원성'을 띠는 개념입니다. 장소는 고정된 것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사회 내의 강력한 제도적 힘에 의해 사회적으로 구성된다고 합니다. 

"실체는 공간을 창조하는 과정에서 경계짓기를 하고 내적 질서를 형성하면서 한동안 상대적 안정성을 성취한다. 그런 영원성은 (한동안) 배제적인 방식으로 공간의 일부를 점유하게 되며, 따라서 (한동안) 하나의 장소, 즉 장소의 실체를 규정한다. 장소 형성의 과정은 공간성-일시성을 창조하는 과정의 흐름으로부터 '영원성'을 만들어가는 과정이다. 그러나 '영원성'은 그것이 아무리 단단해보일지라도 영원하지 않으며, 오히려 항상 '끊임없이 쇠퇴하는 것'으로서 시간에 종속되어 있다. 영원성은 창조, 지속, 소명의 과정에 종속되어 있다. (Harvey, 1996, Justice, Nature and the Geography of difference, Blackwell Publishers, Cambridge, MA, pp. 261)

이렇게 장소란 단순히 멈춰있는 하나의 사진이라기보다 이재용의 작품처럼 시간이 누적되며 고정된듯 고정되지 않은 개념이라 생각해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의도치는 않았겠지만 한국인의 식문화를 대표하는 쌀을 정미하는 곳에, 누적된 시간만큼 머물러있는 장소를 담아낸 멋진 작품인 것입니다.




제목 : 짧은 지리학 개론 시리즈 장소

지은이 : 팀 크레스웰

초판 1쇄 발행 : 2012년 6월 29일

출판사 : (주)시그마프레스


http://www.kyobobook.co.kr/product/detailViewKor.laf?ejkGb=KOR&mallGb=KOR&barcode=9788997927012&orderClick=LAG&Kc




지리, 그 중에서도 인문지리학이라는 개념을 한 문장으로 간단히 정의내리기란 쉽지 않습니다. 말 그대로 인문지리학이라는 틀 안에는 도시, 경제, 문화, 정치, 인구, 사회 등과 같은 인문의 모든 현상이 들어가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시중에 편찬된 많은 인문지리학 개론서들의 방향도 제각각입니다. 개론서를 쓰는 교수마다 자신의 관심분야가 따로 있으며, 그에 따라 인문지리학이라는 범주 내에서 강조하고 싶은 내용과 소홀히 다루는 부분 등의 차이가 나기 때문이죠. 그럼에도 인문지리학을 배우는 모든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동의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바로 인문지리학은 ‘장소’에 대한 학문이라는 점입니다.


인문지리학을 배우기 전까지 우리는 ‘장소’라는 말을 참 쉽게 썼습니다. “약속 장소를 정하다.” “줄곧 같은 장소에만 있었다.” 이와 같은 문장을 이해하는 건 어렵지 않습니다. 앞의 문장에서는 약속 대상을 만나는 어느 곳을 뜻하는 의미로 장소라는 말을 썼으며, 뒤의 문장에서는 움직이지 않고 머물러 있던 어느 지점을 뜻합니다. 앞서 인문지리학은 장소에 대한 학문이라 했습니다. 그런데 그 장소와 지금 예시로 든 장소의 개념이 완벽히 같을까요? 


장소를 이해하기 위한 간단한 예시가 있습니다. 새로 배정받은 기숙사에 도착했다고 가정합시다. 모든 기숙사의 방에는 같은 모양의 침대, 책상, 벽장이 있습니다. 기숙사의 방은 그리 특별할 것이 없어 보입니다. 하지만 조금만 들여다보면 차이점이 나타납니다. 어느 방의 침대에는 커피를 엎지른 자국이 있을 수 있고, 다른 방의 책상에는 칼집이 나있을 수 있습니다. 어떤 방의 벽에는 못 자국이 나있거나, 또 다른 방의 벽장은 낙서가 숨어있을 수도 있죠. 이 모든 흔적들은 과거 어떤 시점에 누군가가 이 방에 살았었다는 증거가 됩니다. 특별할 것 없는 익명의 공간에 역사가 있었으며, 방의 전 주인에게는 특별한 무엇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죠. 만약 내가 방에 새로운 포스터를 붙이거나 가구를 재배치하고, 새로 정리를 한다면 그렇게 공간은 나만의 장소가 됩니다.


다른 예시가 있습니다. 북위 40도 46분, 서경 73도 58분. 이 설명은 특정 지점의 위치를 말해줄 뿐이며, 의미가 없는 어떠한 지점에 불과합니다. 하지만 이 좌표는 뉴욕시 맨해튼의 한 지점을 가리킵니다. 비행기 2대가 북위 40도 46분, 서경 73도 58분으로 날아갔다는 말과, 비행기 2대가 쌍둥이빌딩으로 날아갔다는 말은 확연히 다릅니다. 우리는 이미 어느 장소를 알고 생각하고 있으며, 머릿속에 충분히 하나의 이미지로 담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인문지리학에서 말하고자 하는 장소의 가장 기초적인 개념에 대해 어렴풋이 알아볼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실제 거주하며 모든 행위를 하는 곳은 바로 장소입니다. 우리는 방이라는 장소에서부터 넓게는 지구라는 장소에 살고 있습니다. 곧 장소는 세계를 보고, 알고, 이해하는 방식이게 됩니다. 장소는 우리가 아는 세계 그 자체가 되는 것이기 때문이죠. 우리가 사는 세계를 이해하는 학문인 인문지리학은 장소에 대한 이해입니다. 


팀 크레스웰의 책인 『장소』는 이러한 장소라는 개념에 대해 전문적으로 설명된 책입니다. 먼저 1장에서는 장소라는 개념이 왜 중요한지, 장소와 공간 혹은 경관이 지리학에서 어떻게 다르게 쓰이는지 등에 대한 설명이 되어있습니다. 2장에서는 <장소의 계보학<이라는 이름으로 지리학에서 이러한 장소라는 개념을 어떻게 발전시켜왔고, 장소가 없어질 것이라고까지 했던 지금엔 인문지리학자들이 장소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등을 말하고 있습니다. 다음 3장인 <‘지리적 장소감’읽기> 부분에서는 유명한 인문지리학자인 데이비드 하비(David Harvey), 도린 매시(Doreen Massey), 존 메이(Jon May)의 글을 중심으로 ‘지구적 장소감’이라는 개념에 대해 설명하고 있습니다. 4장 <장소로 연구하기>에서는 장소 개념이 연구된 사례와 장소 연구가 나아갈 방향을 살펴보고 있습니다. 마지막 5장 <장소에 관한 자료>는 일종의 부록으로 각종 추천자료 등이 설명되어 있습니다. 


책의 내용은 우리가 장소라는 말을 쉽게 썼던 것과 달리 생각보다 만만치 않습니다. 그만큼 익숙하게 써왔던 단어 하나에 이렇게 많은 개념과 생각이 들어있었으니 낯선 마음에 더욱 다가가기 어려워 보이기까지 합니다. 저학년의 경우에는 1장 정도만 이해한다 하더라도 충분할 것 같습니다. 하지만 현대 인문지리학사가 장소라는 개념으로 정리된 2장은 지리학사를 배울 거면 어차피 한 번은 봐야할 부분이며, 4장의 예시부분은 앞에서 개념에 관한 정리만 잘 해놓았다면 생각보다 접근하기 쉬워 보입니다. 실제 우리 피부에 닿는 내용들로 잘 정리됐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3장의 경우인데, 인문지리학에 관심이 있고, 조금 더 공부를 해보고 싶다는 사람이라면 하비, 매시, 메이의 학문을 영어 원서가 아니더라도 잘 번역된 글을 통해 접해볼 수 있는 기회이니 충분히 접근해볼만하다 생각합니다.


정리해보자면 『장소』는 우리가 인문지리학이라고 하면 흔히 생각하는 도시지리, 경제지리, 문화지리, 사회지리, 정치지리, 인구지리, 교통지리가 아닌 정말 본질적인 인문지리학의 개념을 생각해본 책입니다. 이런 기본에 대한 이해를 한 뒤에야 충분히 인문지리학을 배울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추천하는 책입니다.

BLOG main image
by Fozs

공지사항

카테고리

분류 전체보기 (7)
야구 잡담 (3)
지리 잡담 (4)
이런저런 잡담 (0)

최근에 올라온 글

최근에 달린 댓글

최근에 받은 트랙백

Total :
Today : Yesterday :
05-19 05:39